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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제목처럼 10년전 일기를 꺼내어보다... 본문

사람과사람/운명적인 만남

노래제목처럼 10년전 일기를 꺼내어보다...

햇살과산책 2007. 3. 31.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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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와서 그런지..
아마 군대를 다녀온 분들은 비가오면 야외활동을 안하기에 신날수도 있고 근무나 기타 훈련상황 아니면 휴일이거나하면 짜증이 엄청 증폭될수도 있겠네요.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 아무래도 자신을 위한 시간이 없어집니다.
직업적으로 글쓰기를 하거나 비슷한 여건에 처하기 전에는...
그래도 가정생활은 그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부분은 결혼을하고 아이가 있으면 말안해도 잘아실겁니다.
이 일기를 꺼내보니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사람 같습니다.
예전에 다락에서 아주 조심스레 쌓여진 것을 아주 조심스레 뜯어서 보던 20대초반에 쓰여진것들은 말도안되는 과장에 엄청나게 깔깔거리며 읽었는데 CD정리하다 발견한 10년전에 쓰여진 이것들은 지나치게 진지하네요.

             
 헤테로토피아의 단상

                                              - 김종휘

 1997.7.5

 이미지에 한껏 헛배부른 시간들이 손을 흔든다. 분명 생각과 생각의 틈바구니에는 몽상과 망상이 공존했다.

 1997.7.6.

 너무 쉽게 허무란 말과 만난다. 문득 이게 습관성이 아닐까 자문 해본다.
 칙칙한 장마, 캄보디아 내전,
 허무란 말은 내뱉자마자 이 도시에선 쉽게 비웃음과 만나고 늘어선 가로등이 비꼬는 지루한 시간들이 이어진다.
 
 1997.7.7.

 바닥에서 박박 기리라, 무색을 꿈꾸는 먼지여
 계속 돌아볼지어다, 그대의 문제는 언제나 꼭대기에 걸린 잡동사니들의 난장판 이었음을
 의심의 노래가 곳곳에서 돌아오고 있다. 당도한 바람이 그대를 내동댕이 치지 않음은 안스러움이 아니지. 동정도 아니야. 그래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지.
 다만 그대의 머리카락을 한 쪽으로 휩쓸 뿐이지. 그대는 그 편협이 몰고온 서자.

  1997.7.10.

 계속 후덥지근, 무질서가 부른 일상의 자잘한 사건들이 범람한다. 무작정 버려진 쓸만한 물건들. 추억의 설경 속으로 난바다를 떠도는 쓰레기. 친구는 부질없을지도 모르는 연인과의 이별을 준비하고, 흩어지고 또 만나는 사람과 사람.
 참새 한 마리 방안으로 들어왔다 재빨리 나갔다. 바뀐 전화번호만 적혀있는 수첩 속으로 부재중인 그들에게 계속 신호를 보낸다. 어둠은 성급하지 않다. 동이 트기 까지 가위 눌린 활력으로 지샐지어다. 밋밋한 어둠의 무늬들은 그대를 쉽사리 부풀리고 오그릴 것이다. 하여, 부패한  作爲의 숲은 밀림 속으로 떠밀려 잊혀지면서 우람하게 자라리라. 열기를 식힐지어다.

 어떤 해석, 어떤 징후, 어떤 욕망, 샐쭉한 자아, 밍기적거리는 일상, 어떤 활력, 어떤 빈곤, 씁쓸한 은거, 징그런 모기, 그래도 진행중인 시간.

 시간과 공간의 節合.
 
 늘어지는 정점에서 낙하하는 졸음.
 신발끈을 묶는 클라이머, 후리듯 진지한 줄 던지기, 붙박힌 눈동자, 가장 완벽해야할 하강.
 엇박으로 엮이는 삶의 리듬. 그 속은 항상 거뭏한 빛.
 
 깜빡이는 노을 속으로 검은소 심호흡한다, 숨결따라 숨결따라 걸어가는 사람.
 열려진 하늘문, 黑雲이 몰려온다.  
 
 1997.7.11.

 푸름과 노을이 구름을 분할했다. 아니 이루어지기 힘든 공존을 하는 하늘이었다. 비를 부르는 바람이 서서히 소나기를 뿌리고, 더위가 산뜻하게 물러간 듯하다. 가만히 귀 기울일 틈 없이 동네는 장엄한 협주곡을 연주하고, 창문을 싸락싸락 나주손이 동티난 마음을 달래어준다.
 이런 밤이면 동 끼호떼처럼 곱게 미친 늙은이와 이야기하는 것도 괜찮으리.

 1997.7.12.

 집착: 가능하면 버려라. 쉽게 성글고 어렵게 흩어진다.
 
 그늘을 배회하는 떠돌이 개, 가벼운 걸음으로 볕을 피하더니 피멍든 뱃가죽을 핥는다. 늘어진 시간이 오종종 볕을 거두었다.
 
 무서운 여름, 피식 쓰러지는 쓰레기통, 아이들이 깔깔대고, 하얀돌 던지는 어둠.

 비를 거두어 창문을 두들기는 바람. 틈엔 칼날 자국을 내고 강물 속으로 투신하며 몸을 불린다.
 
 정신이 너무 멀쩡하다. 곱게 미치길 포기했지만, 바람 한 점 거두어 때가 오면 날릴지어다.

  1997.7.16.

 노래에 취해 이 곳까지 왔지요. 펄럭이는 시간이 현재와 손잡고 뒤돌아봅니다. 가능하면 계속 취해도 좋겠지요?
 어물렵, 환상과 진술이 엇갈려 불협화음.
 
 슬며시 진행중인 시큼한 용암처럼 파도와 대작하는, 웃음이 터져나오는 긴장의 이완, 상상 임신처럼 배부른 바람 속을 건너는.

 부대끼는 無를 꿈꾸는 절망의 부질없음. 삐죽삐죽 새나가는 부담을 이겨내려 취중망언을 중언부언 견강부회,
 나는 지금 없는 대상 때문에 지껄인다. 상대 없는 싸움은 꾸물꾸물 엮이는 지루한 뻐쩡댐.

 표현, 이미지, 삶의 무작위적 반복.
 
1997.7.17.

 경계 바깥에는 자유롭게 열린 카오스가 있을 것이다. 매혹과 연계되었지만 몸적인 충격과 예측불허의 두려움이 증폭, 묵시록적 종말이 지니는 겸허와 몰이해의 양극단.
 경계와 경계에 끼인 자는 구도자적 자세를 지니고 있다. 열린 가능성은 예민한 신경을 지니게 해주지만 급하게 소모하는 몸과 정신.
 경계 안에는 안락함이 있다. 하지만 안락을 취하기 위해선 아귀다툼에 익숙해야한다. 그래도 경계 안은 떠도는 자에게 최소의 물리적 공간을 마련해준다.

 열린 가능성은 피비린내를 봉쇄할 수 있을 때 가치를 얻는다. 거대 담론의 환상적인 요소들이 지워지려면 깨어 있는 방법을 찾아야한다.
 거대 담론을 필요한 위치에 거주시키기. 비교하는 방법이 지니는 장점은 균형감각을 일깨워준다. 그러나 비교에 탐닉하면 제자리 뜀뛰는 고만고만한 군상들의 아귀다툼이 일어난다.

 적절한 우주.
 상대론이 지니는 미덕을 살리기 위해선 꼼꼼한 추찰이 필요하다.
 증폭하는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적절한 대응은 밧줄로 몸을 묶은 오딧세이적 지혜.
  1997.7.22.

 깊은 상처 입은 것처럼 말짱한 나날이 빨리 지나간다. 상식에 식상한 놈이라고 중얼거리던 광기는 사라졌지만 그 끝을 부여잡은 조각조각들이 몸 구석구석을 찌른다. 일상은 복잡한 폼을 잡는 단순함을 배우면 그럭저럭 때우는 관대함과 건드리면 터질 상처 같은 자아를 양옆구리에 달고다닌다. 그래서 독설이 터지면 우물쭈물 망가뜨린다.

 파열하는, 가까스로 진정, 부대끼는, 망가진 여름, 구슬픈 노래.

 시간이 옹이지고, 성글고, 시나브로 사라질 때 붉은 어둠 따라 재된 욕이 튀어나온다. 안개 피어나는 새벽 바위 곁으로 행군하는 쫄병처럼 부르튼 발. 부슬비 이슬비 어둠은 소근소근 별을 내쫓고 달겨드는 잠.

  1997.7.23.

 바람이 제자릴 찾기 위해선 멋드러진 장애물을 만날 것.

  1997.7.30.

 오랫만에 등산을 했다. 군생활의 추억이 서린 경원선 기차를 타고 소요산에서 내렸다. 등산하는 사람은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두 명을 빼곤 없었다. 자재암의 탱화는 퇴색이 심해지기 직전의 산수화였고, 나한전의 지장보살은 인상적이었다. 좀더 자세히 들여다볼걸 그랬나보다. 의상대 밑에 있는 구절터에 흐르는 계곡물은 너무 차가워 일 분 이상 발을 담글 수 없을 정도였다. 원효가 지었다는 소요산이라는 이름은 장자를 떠올렸지만 날씨 탓인지, 살짝 비가 왔다면 운치가 있었을텐데. 그러나 이도 역시 사념이 이끌어낸 망상일테고.
 산 초입의 노래방이며 여관등등은 가관이다. 수덕사 입구나 설악산 중턱의 술집 보단 그나마 낳지만 온갖 바가지와 엮여진 향락은 도시에서 충분할텐데. 자본의 논리와 욕망의 분출은 시대에 따라 적절한 자율성이 필요하다. 지금은 지나침을 지나 돌이키기 힘든 상황으로 돌진하고 있는 것 같다. 즉 돌이키기 힘든 상황이 닥치기 전의 반성이 너무 없다는 소리다.

 산은 언제나 겸손을 가르쳐준다. 나한대와 의상대 중간에 있는 이 미터를 조금 넘을 듯한 흰바위에 가까스로 올라가서 내려오다 다칠 뻔했다. 끝까지 쫓아다니던 날벌레도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잊어버렸다. 온갖 소리를 내버려두는 산꼭대기.   
  
 1997.8.5.

 패턴 속에는 짜증과 재미가 공존한다.

 저자와 지식인이 죽거나 축소됐다는 서구의 이론에는 건방짐과 불안이 우로보로스처럼 자기 꼬리를 물고있다. 다음 수순은 조롱과 광기의 나열 속에서 커다란 머리만 남은 두 마리 뱀.
 
 변화란 스스로의 속박을 더 큰 속박으로 묶는 것이다. 인간의 한계는 와해된 속박을 보는 순간 죽음을 맞이한다.

 기술관료, 즉 테크노그라트의 한계는 계속적으로 만병통치약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무서운 희극을 연출한다는 점이다. 물론 대충 때우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더러움을 쉽게 체득한다. 예술은 이 지점에서 자유로운 구속을 부여한다. 물론
같은 더러움은 쉽게 일어나지만 사이를 해치지 않는 망상일 뿐이다.  

  1997.8.7.

 감각의 깊이는 더불어 이루어지는 場의 여건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닫혀 쇠하는 공간은 대체로 절차가 복잡하다. 어떤 시기로 한정되어야 할 편향된 집중이 딱딱하게 굳어지면 떼어내기 까지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하다. 성숙이란 그래서 쉬운 듯 어렵고, 어려운 듯 쉬운가보다. 역설이 지나치면 희화화된 일상이 전면에 부각된다. 지겨운 잔대가리 싸움이 쇠하게 만드는 공간을 이루어낸다. 삶이란 김현 선생님의 말처럼 더러운 꼴을 다 경험하는 것일까?

 노동에서 노래가 나오지 못함은 행복한 시대가 아님을 반증한다. 구색 갖추기와 개인적 재미를 물과 기름처럼 공존시키는 일상의 일터. 심미적인 것들은 몸과 정신의 불협화음에서 나온 아귀다툼이 돌출한 명분 속에서 공중부양을 꿈꾸게 채근당한다.

 표현은 집중된 바람이다. 굳어 멋드러진 시공간을 만든다는 것은 인내와 광기의 접점에서 배회하게 만든다. 초월은 왠지 싸가지 없지만 희열을 실어다주기 때문에 중독성을 지닌다. 그렇기에 유토피아는 푸코의 말처럼 사람을 위로한다. 구마라즙의 고뇌는 재능에 의해 파먹힌 삶이며, 명민함이 몰고온 식자우환의 전형.

 삶은 일정한 법칙을 필요로 한다. 경우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카오스적인 조화를 구할 수 있다. 이런 상대론은 기생성을 지니고 있기에 공생을 위해선 적절한 사이를 구현할 수 있어야한다. 싸움의 시작이며, 윤리의 창출이며, 심미적 지어냄을 묶어내구 있구나.
 
 1997.8.18.

 습관이란?
 다듬으며 구속하는, 대체로 몸처럼 하나로 이루어지는 여러 갈래.

 반성이란?
 애매한 말이지만 적절한 진화를 위해.

 몸의 근기가 흐리멍텅한 오늘 습관처럼 무관심을 거리로 보냈다. 가능하다면 벌을 받을 것같은 모호한 느낌. 흐름을 타고 재독하는 김영민의 ‘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는 더더욱 질타한다. 아니 내가 나를 질타하는 습관적인 책읽기. 책읽기를 통해 나는 사라진다. 문득 일어나는 나는 돌이키기 힘든 늪으로 빠진 느낌을 솎아낸다. 까뮈의 ‘결혼/여름’이란 책에 묘사된 알제리의 해변과 그 곳 사람들처럼 서구인의 눈에 비친 이방적 활력에 총을 당기는 뫼르소처럼 가당치 않은 충동이 옹그라니 노려보고 있다. 나르시즘적 질투, 아닐 것이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겨먹는 경우처럼 뻐쩡댐, 시효가 지났다. 구색 갖추기 전쟁을 벌이는 대중 문화와의 불화가 가져온 소외감, 맞긴 하다 그렇지만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정도 어긋남은 견딜 수 있다.

 가위눌린 활력이 있다. 빈공간을 점점이 지나간다. 스치긴 스쳤다. 뒷그물을 맞추는 놀라운 속도의 흰공. 잠시 시간이 뒷짐진다. 광대를 들러메고 짜라투스트라는 영혼의 결핵 환자처럼 유유히 몰락의 불덩이를 지폈다. 날벼락이 비를 부르고 섞인 바람이 몸을 적시는 어느날.          

  1997.8.24.

 요재지이를 읽을 때 낄낄거렸던 여러 대목처럼 책상물림적 몽상이 가져오는 나르시즘적 욕망들이 휘발성 물질처럼 날아가고, 맞물린 현실이 몽상을 망상으로 변질시키는 즉 스스로 속박을 부여하면서 생긴 괴로움은 눌변과 어울려 다채로운 망각의 지하묘소로 이끌고 간다. 이문구 선생의 입담과 어울린 만연체나 채만식의 풍자가 결벽증과 소통하는 정결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열정의 방향이 당대와 어울리기 때문이리라. 살아남으며 두루두루 살피는 쇠고집 정신. 

 1997.8.28.

 믿음과 현실의 격차는 어디서 올까?
 오늘 아침에 잽싼 도둑질에 당한 내 모습에서 망연자실한 웃음, 별로 궁해 보이지 않았던 그 여자의 뜀박질하는 뒷모습에서 오랫동안 묵묵히 흐르던 타성을 일깨운다.
  익명의 여도둑은 실수로 떨어트린 전철 패스를 뒤돌아보는 순간 내게 집어 건네주는줄 알았지만 전철이 들어오는 소리와 뜀박질의 순간이 겹치면서 우울한 일상을 건네어주었다.

 세르와 톰은 직관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외줄 타는 사람처럼 현란한 이론이 많은 요구와 질서가 엮여 건너가고 있다.  

  1997.9.11.

 시는 그런 무의미들과 엮여 천천히 아주 천천히 완전하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지루해하면 할수록 떨치기 힘들다. 오히려 적요로운 일상과 더불어 살금살금 불을 지피는 것이었다. 솎아진 언어들은 균열과 파괴, 예측불허의 진경들이 머리 속을 난도질하는 것이었다. 제대로 시를 쓰는 날 몸은 날아갈듯 우화의 길을 안내할 것이다.

  1997.9.22.

  밈, 자기 복제하는 유전자. 문화의 형태를 지니는 인간의 생활방식은 장인적 기교를 통한  물질, 즉 氣라는 단어로 이해할 수 있는 넓은 의미의 物質들이 나름의 자생적인 완전성을 지니는 형태를 말한다고 이해했는데 밈이나 유전자나 맹목적인 자기복제만을 한다고 말한다. 인간만이 이 전제적 지배자를 반역할 수 있다는 의미는 의식적인 선견능력(직관을 말하는 것일까?)이 독자적으로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는데. 太虛를 논하고 倫理적 세계를 꿈꾸는 新儒學의 거장들을 연상시키는 대목들이 주목할만하다. 카프라를 읽었을 때의 경이감 비슷한 당혹감들이 튀어나온다. 
 
  1997.10.1.

 나츠메 소세키의 [문/ 송현순 역/ 1994/ 밝은 세상]을 읽었다. 무색의 표면 위에 검은선 하나를 그려놓은 듯한 구성에다 점점이 검은선 속으로 들어가는 듯 하더니 다시 제자리걸음하는 소설. 시공간의 차이인지 모르지만 군국주의가 한창 팽창하던 시절의 소설이라는 점에서 해석의 실마리를 찾음은 방만한 말장난이 될지도 모르겠고, 매력과 죄의식이라는 틀 속에서 노인처럼 살아가는 삼십대의 불륜으로 맺어진 부부의 이야기.

 1997.10.15.

 나는 아직 낙관주의에 머물고 있다.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를 세 번째 읽으면서, 읽을 때마다 새롭게 해석되는 통찰들이 살아 나오는 문맥 속에서 명료한 헤부적거림을 느끼게 만들어준다.

 깊이와 직관의 차이와 어울림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나는 명료함 즉 분별을 꿈꾸다 매혹을 잃어버리는, 그럼으로 둘 다 잃어버리는 느낌을 받곤 한다.

  1997.10.27.
 복거일의 [캠프 세네카의 기지촌/ 1994/ 문학과지성사]와 은희경의 [새의 선물/ 1995/ 문학동네]를 읽었다. 복거일의 단정한 문체와 여운을 불러일으키는 단문으로 구성된 이 소설에서, 역사의 민활한 동시에 빨리 은폐시키는 속성을 감각의 깊이라고 이름지을 수 있는 섬세한 통찰력으로 복원시키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비명을 찾아서’에서 보여준 통찰들이 경험 속에서도 살아나고 있다.
 상대적으로 은희경의 잡스러움 속에서 피어나 딴죽거는 일리 있음은 흡입력을 지니고 있다. 이 잡스러움은 시대적으로 공유하는 경험이라는 점이고 소설의 주인공인 진희가 지닌 성장기의 결손 가정은 잡스러움을 빤히 쳐다보게 하는 아픈 배경이 되어 희비의 쌍곡선을 냉큼 뛰어넘지 않게 만들고 있다. 내 책읽기 경험 가운데 원형처럼 존재하는 카아슨 매켈러즈의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의 여주인공이 벙어리인 싱어에게서 느끼는 연민이 은희경의 소설에선 그 대상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가 있음에 우리의 현대사는 이모양 이었구나로 까지 비약되는 망상.

 박남철은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변하지 않음이 좋을지도 모른다. 다만 언제까지 가능할지 궁금할 뿐이다. 광기와 엮인 진실이란 압박과 끝없이 싸우게 마련인가 보다. 스스로의 잘못과도 멱살잡고 싸워야하다니, 그의 말대로 그는 시인일 수밖에 없구나 빌어먹게도.
  1997.10.28.

 예비군 훈련장, 예정에 없던 소집, 불편한 교통, 터벅터벅 걸어온 산길, 텅 빈 승합차를 끌고 가는 사람, 패잔병 같은 모습으로 소읍을 가득채운 군복들.

 나의 무기력증은 어디에서 오는가?
 눈에 불을 켜고 읽던 지적인 담론들이 모두 생경한 곳에서 뛰쳐나온 것처럼 무미건조하게 쳐다본다. 아니 텔레비젼이나 시골 동네 풍경도 마찬가지. 몸으로 스며든 체념은 분명 관념의 웅크림이 조장하는 나르시즘적 욕망의 부질없음을 눈치챔에서 오는 것 같은데! 욕하기도 귀찮은 시간의 흐름.
 
 1997.11.27.

 감성을 일깨우는 것들은 결국 일상이다.
 
 가벼움이 너무 횡횡한다. 진지한 가벼움은 代價를 바라지 않는다. 단지 몸적인 예측불허를 즐길 뿐. 결국엔 귀소하는 공간만이 남을 것이다.
 
 1997.12.2.

 시간의 흐름은 삶을 한 방향으로 몰거나 여러 방향으로 분산시킨다. 분별의 상실은 혼돈의 와중에서 극단으로 몰고 가는 성향을 가중시킨다. 이 지점에서 매혹은 굵직함과 가냘픔을 설정하고 그 중간에서 배회하게 만든다. 그 간극이 넓어질수록 예민한 신경을 지니게 한다. 쓸모 없는 생각들이 실시간에서 행동하게 되어지면서 절충을 배우게 되고 더러운 타협이 빈번해진다. 이 지점에서 급변이 발생할 확률이 높아진다. 하지만 지난날의 궤적, 즉 역사라는 이름 아래에서의 급변이나 혁명은 그 이상들이 단명함을 당연하다는 듯 지속적이지 못한 상태를 보여주었다. 가령 태평천하의 윤직원 영감 같은 인물을 도처에서 쉽게 발견하게 되면서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는 미래상을 엿보게 되는 현실이 닥쳐오는 것이다. 혹자는 이런 말을 하면서 스스로의 자기추스림을 할줄 모르면서 입바른 소리만 해댄다고 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런 변절에 너무 익숙한 시간대에 살고 있다. 
 문명의 작위성. 도킨스의 말처럼 선천적으로 이기적인 유전자라는, 까마득한 조상의 것까지 지닌 녀석이 선천적인 예견능력을 발견하고 제대로 펼쳐질 수 있는 장이 형성되기까지 삶에 부여할 수 있는 적절한 자기제어 방법은? 

  1998.4.8.

 삶이란 후즐근한 견딤이란 생각이 든다. 라오서는 아주 매력적인 작가란 점을 루어투어 시앙쯔를 재독하면서 느꼈다. 무덤덤한 듯한 표정 뒤에 숨긴 인간에 대한 따스한 애정이 스며들어있는 시선을 자연스레 보내고 있다.  시앙쯔는 내성적이지만 자존심이 쎈 고집쟁이면서 동시에 주어진 일을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지만 이기적일 수밖에 없도록 성장환경을 가진 평범한 하층민이다.  이 촌뜨기 시앙쯔가 대도시 페이킹에서 겪는 일상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돌아오는건 경제적인 제자리걸음과 여러 사람에게 당하기만 하는 자괴감을 맛보았을 뿐이다. 결국 시앙쯔는 불한당이 되어 정치판의 혁명꾼을 팔아넘기거나 그럭저럭 손쉬운 일만 찾아 하루하루를 넘기는 모습으로 이 소설은 끝나고 있다.
 미국에선 이 소설이 해피앤딩으로  번역되어 꽤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왕룽의 성공처럼 미국적인 특성의 하나.
 
 1998. 4. 14.

 내 이십대 초반을 저울질하던 시인인 이성복. 무모한 열정과 치기들이 혼종된 공간에서 낄낄대는 버릇을 키우고 있을 때, 아직껏 벗어나지 못한 유아기의 버릇 같은 흔적들이 지금여기의 나를 마구 흔드는 비릿한 시간.

 이성복의 시는 나의 둔한 머리가 아는 것들을 비스듬히 가로지르고 있었다, 물론 현재까지.
 초현실적인 것들에 집중하면 그의 가난이 몰고 온 듯한 날카로운 현실이 버틴 채 서정적인 공간으로 달아나고, 그 서정의 흐름에 기대면 그는 집채만한 화면에 역사적 비의들을 틀어대며 그 현란한 빛들만 감상할 수 있는 측면으로 나를 몰고 갔다. 그렇게 즐겁게 후려진 나는 햇살이 따가운 철책의 막사에 기대 그의 밤을 읽어대고 있었다. 뒤돌아봄이 주는 씁쓸함이여, 나는 그로인해 쉽게 늙을 수 있었으니 이 때이른 축복 앞에서 빙글빙글 춤을 추는 것이었다.

  1998.4.19.

 요 며칠을 강준만의 인물과 사상과 더불어 보냈다. 한 마디로 강준만은 복거일 식으로 이야기하면 성찰적 진보주의자라고 이름 붙일 수 있겠다.  이에 비하면 유시민은 순진한 진보주의자? 물론 멍청하단 소리는 아니다. 호치민을 닮은 거꾸로 읽는 세계사의 표지 사진 때문일까? 진중권이라는 필자는 생소한데 내가 영원한 제국을 읽은 뒤에 가진 혐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把持陰莖? 화이트헤드? 하하하~

 강준만식의 잣대는 분명 구도자적 시도는 아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공생을 부르짖는 종교의 실천성과 들어맞는 부분들이 있다. 

 인물과 사상을 읽으며 많은 생각들이 머리 속을 번뜩이며 지나갔는데 바람처럼 사라졌다. 글쓰기에 있어서의 距離라는 것을 생각해본다. 결국 시간의 흐름은 망각의 문고리들을 만드는 것이리라. 그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자는? 

 1998.5.12.

 시간의 흐름은 결국 방향성의 문제겠다. 직선적인 시간이 파시즘적 집요함을 만들어내듯이 산만한 시간 역시 집요한 퇴행들을 이끌어낸다. 인간의 욕망이 지니는 이중성이 일리를 지니고 다시 드넓은 속세에서 자기자
리를 추스릴 수 있기까지 시간의 무게는 주름진 굴곡들을 만들어내고 있으니 삶의 신비여!

 무신경함이 미덕처럼 번지고 있다. 분업화의 단점들이 몰고온 차이를 참지 못함이여, 봉건적인 구획의 경험이 부족함에서 오는 불성실함일까?
 
 1998.5.14.

 무엇을 만든다는 것, 창조를 한다는 것은 불안한 결벽 속에서 희열을 느낄 때까지 매진하는 속에서 이루어질 때 성숙과 만날 수 있다. 일상의 중요성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일회적 가벼움이 투기적 심성을 키우듯이 급변이나 혁명은 시의성의 정점을 탈취하고는 하산하다 벼랑에서 떨어지는 모양새를 만들어낸 경우가 많다. 이런 경험은 평상적인 일상의 감각을 부지불식간에 떨구어낸다. 몸적인 경험을 거역하기 힘든 것이 인간이다. 결국 이런 사후적 진단은 뒷북치는 모양새임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협의의 장을 이끌어 가야한다. 협의의 장이 일그러질수록 급변이나 혁명이 필요한 순간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창조란 그럼으로 일상에서의 나름의 가치를 지니며 조화를 이루는 몸을 전제로 한다.
 
  1998. 6.1.

 무엇과의 밀착이라? 가만가만 아침이 다가오고 정갈한 기운들이 지저귀는 오솔길의 산책. 황당한 어둠의 무늬들이 사그라들면서 편력의 마지막에 당도한 소담한 진흙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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