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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끼적끼적 찾아내다.. 3

햇살과산책 2007. 7. 13.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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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첼 '철학을 사랑하는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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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는 가끔씩 시사주제를 정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당시에 김영삼 전대통령이 사라졌던 개그를 다시금 선보이던 시절인데 회고록을 출간하면서 일부언론에서 전대통령의 의견이라는 미명하게 자기의 목적에 맞게 가공해서 이슈화 시켜 정치적인 공세를 펴던것에 대한 우려의 입장에서 의견을 냈었는데 이부분을 직접적인 대응의 의미로 접근하던 분과의 의견교환이었습니다.

지금보니 비난의 입장은 같았지만 제가 언어표현을 곡해하게끔 사용한것이 있었고 재미있는 것은 정치적인 이슈에는 한발씩 빼던 분위기를 볼수 있습니다. 대화라는 것은 서로 상대방의 의미에 서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2001년 2월 이번주 시사주제:김영삼 두번째 회고록출간!

답변: 비난의 이유

아마 김영삼은 사적으로는 아주 순진무구한형이라고 예측이 됩니다
문제는 그게 공적으로 변화하는 지점에서
많은 문제들을 일으킨다는 점에있지요.

현재의 발언들이 문제되는 것은 언론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현재의 국내상황에서 정치권력보다 더 무서운게 언론권력입니다(강준만의 인물과 사상 시리즈를 권함)
즉 가짜 보수세력(보수적인 것은 언제나 필요합니다, 다만 나름의 기준을 가진 잣대가 있어야겠지요,
상대방이 맞던 틀리던 입장이 다르다고 트집잡는 행태는 가짜의 모습이 아닐까요!)들에 의해서
부화뇌동하면서 자기도 알게 모르게 이용당하는게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심리적으로도 정치권력에 대항하면 사람들에게 하다못해 잘해볼려다 그랬다는 이야기를 듣지만
언론에 잘못걸리면 이 사회에서 사장되는 것은  쉬운일이지요.
촘스키 같은 언어학자가 그렇게 언론의 유명한 저널리스트들을 물고 늘어지면서 심한말을
하는 이유도 그런 하이에나적 행태가 공적인 영역의 질서를 어지럽히는데 있어 그렇겠지요
(즉 지나친 밥그릇 싸움 논리에 얽매여 스스로의 장막을 쳐놓고 장사하면서 거슬리면 슬쩍
민심이 어쩌고 하면서 뒤통수 치는 수법. 우리나라에서 왜 조선일보를 밤의 대통령이라고 할까요?)

개인적으로 그런 발언들을 사석에서 지나가는 말로 했다면 충분히 이해할 용의가 있습니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일 수도 있으니까요) 아니면 어떤 나이많은 아저씨가 포장마차에서 술김에
그런 이야기를 했다면 그렇다고 맞장구 쳐줄수도 있지요.

하지만 공적인 매체를 타고 나오는 것은 그만큼 여러곳으로 열려있다는 뜻입니다.
즉 파급되는효과가 다릅니다. 공인으로서는 해서는 안될말들을 마구 지껄이는 것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연결하면 뒤통수 치는 수법을 쓰게 만드는 재료들을 계속 공급하는 셈이지요.
물론 쓰는 수법은 전직대통령의 의견이니, 하면서 가장 많이 쓰는 수법은 양비론을 쓰는겁니다.
가령 아이들 둘이 싸우는데 한아이가 누가봐도 잘못이 많은데 둘다 나쁘다고 혼내는 수법이지요.

여기에서 마키아벨리 흉내를 내는 것은 대통령이 아니라 언론이라는 또 하나의 패거리들입니다.
끌끌 포스트 모더니즘은 여기에서 쓰일 수도 있겠군요(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민음사)
진짜 같은 가짜가 가짜 같은 진짜를 집어삼키는 현상
인간이 가지는 이미지 포장술이 세련되면서(실제은 변화라고 보는 것이 옳지만) 현혹시키는 기호들.

정리를 해보면
개인적으로는 그게 진심이든 아니든 그런 생각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공적인 채널을 통해 오는 것이라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게다가 전직 대통령이라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던간에 어떤 이해관계에 따라서
적당하게 맞장구 쳐주면서 다른 온당한 것들에 손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
즉 하나의 공동선을 깨뜨리는데 이용되기 십상이지요.
즉 공적인 영역에서의 질서라는 것을 무너뜨리며 남에게 피해를 입히며 자신이 이득을 취하는
것들에게 양분을 준다는 말과 같습니다.

푸코는 권력의 속성들을 파헤치고 비판하면서 동시에 생산성을 수반한다고 했습니다.
푸코의 일생을 보면(디디에 에리봉의 저서에 자세히 나옴) 후기에는 격렬한 정치투쟁의 장에
어울리지 않는 사르트르와 연대하면서 나옵니다.
말을 조금 조합하면 그런 생산성이라는 것도 사회적 상황에 따라서 정당한 것과 불합리 한 것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그런 불합리다고 느껴지는 것들이 정식화된 경로를 따라서
이루어질 때 오는 것들이지요. 물론 그 입장과 시각이라는 것은 다르지만 그런 조건들을 떠나서
하나로 묶어주는 지금 여기라는 공간의 어떤 불합리한 것들.
사람이 논리를 세우고 철학이라는 것을 언어로 규정하고 하는 것들은 지금의 근대국가의
연장선상에서는 계몽적인 도덕률위에 즉, 타아에 대한 배려의 입장을 가지고 이성이라는 논리성을
바탕으로한 사람 사이의 관계가 아닐까요? 물론 순진한 철학하는 사람의 이야기일테지만.....
즉 자기에게도 배려(그러고 보니 푸코의 저서의 제목과 같네요)를 하고 남에게도 배려를 할줄
안다는 것, 그 것도 까다로운 것까지 살핀 다는 것.

철학함의 하나의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가 너무 멀리 왔군요. 지루하셨다면 죄송.........


원래 주제를 발의하셨던 분이 순진무구란 단어에 이의를 제기 했습니다.
이부분은 글을 쓰면서 제가 표현을 인간의 존엄성을 생각하다 오버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발의하셨던분은 적절한 응징이 필요하다는 것이었고 저도 동의는 했지만 혹시나 물리적이고 폭력적인 제재를 가하는 것에 대한 염려스러운 뉘앙스를 가지고 이야기 했던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배설하듯 말을 막한것은 아니었고 상당히 논리적으로 했습니다.
중간과정의 글을 생략하는 이유는 이부분을 구체화시켜 논의하는 목적도 아니고 해당글을 작성하신분과 연락하기도 어렵고(현재는 로그인 상태로 작성된 형태가 아니라 글과 작성자 이름만 옮겨놓은 상태입니다) 특정공간에서 회원끼리만 이야기하고 시일이 지난것이라 공개하길 싫어할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였습니다.

다시 답변: 어떤 입장을 갖는다는 것의 의미는?

이글은 반론보다는 제가 써놓은 것에 대한 부연설명이 될 것 같군요

여기에 시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시간의 속성은 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돌이켜 볼 수는 있습니다
공간은 무엇일까요?
사람이 알고있는 공간의 지각능력으로 공간이란 것은 무의미할 정도로 넓습니다
(현대 물리학의 성과들을 생각하면)
하지만 말그대로 그 비어있는 것처럼 느끼는 넓음의 사이입니다
결국 어떤 사람이 몸으로 느끼는 공간이라는 것은 한정적이고 한정적이 마땅합니다
그게 무한정으로 간다면 물리적인 사람의 조건이라는 것은 지금과 매우 다르거나
현재의 문명이라는 것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즉 지금여기에서 하는 행위들은 모두 무의미하다는 뜻과 같습니다.
세계라는 것은 그 공간과 시간의 속성에 의해 움직인다고 사람은 느끼는 것입니다
어떤 철학자(김용옥)는 그 시간과 공간의 속성을 천지라는 개념속에서 살피기도 하지요
(김용옥의 기철학 산조-통나무, 개인적으로 김용옥의 저술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함)

나는 지금 무슨 의도로 시사적인 주제에 이런 얼토당토않은 말들을 풀어놓고 있을까요?

김영삼이 순진무구하다는 말은 실제적으로는 욕하고 싶은것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지요
이런 완곡함이 필요한 이유는 시의성과 나라는 자아가 가진 한계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말을 조금 더 부연하면 사람이 어떤 수단으로 무언가를 표현한다는 것은
많은 함축된 과정들을 한정된 하나의 표면위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많은 오해를 받을 수도 있고,  필요이상의 찬사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곡예와도 같은 과정을 염두에 둔다고 가정하면
결국 모든 표현은 편견의 산물입니다. 인간의 몸이 가지는 한정됨이 생존의 조건이듯
편견도 그 생존의 조건의 일부일거라 생각됩니다.
그럼 이런 편견이라는 나쁜것일까요? 
제생각엔 그런 편견들이 어떻게라는 의식 속에서 보는것과 행동하는 것에 대한
결정을 하는 것이 입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지금 김영삼이 그런 발언들을 하는 것은 그런 편견의 소산인 것입니다
다만 그 편견이라는 것이 사람사이에서 오가는 한정된(하지만 전부인것처럼 느껴지는)
질서라는 것들의 균형을 뭉개트림에서 오는 우려의 마음이겠지요
물론 시의성이라는 대 전제하에서

이야기가 또 길어지기 시작하는군요
여기서 제 입장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는 장광설이 될 가능성이 높고(이야기를 간단명료하게 논하지 못하는 능력의 부재도 있고........)
하나의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병에 걸렸는데 양의처럼 어떤 현상에 대한 즉각적인 대처를 하는 방법과
(참고 임상의학의 탄생-미셀푸코, 병원이 병을 만든다- 이반일리치)한의처럼 예방차원을 더 중시하는
(물론 이 두가지는 섞여있지만 기본적인 전제를 이야기함)입장이 있다면 저는 후자를 택하겠습니다.

하나의 방법론을 이야기하라면 오히려 대꾸하지않고 무시하는 것이 낳습니다
계속 맞장구 쳐주면 오히려 더크게 만들어 준다고 할까요
(물론 이런 태도는 그런 행위들이 올바르지 않다는 의미에서의 대자적 입장입니다, 즉자적으로 각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이라면 또 다른 행위가 올바를 수도 있습니다, 현재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혼자 원맨쇼하다가 들어가게 만드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되지만 제가 전에 썼던 글의 의미는 그런 방법론이 통하지 않게 하는 우리사회의 하나의 축을 이야기 했을 뿐입니다, 또다른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이 이야기를 하면서 느낀것은 언어의 한정성입니다.
이분도 입장은 공감하지만 제가 했던 표현들이 너무 순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듯 했습니다.
그리고 편견이라는 단어에 대한 설명을 제기했습니다.

세번째 답변: 편견이라는 언어적 표현의 의미

상대주의의 가장 큰 함정은 귀에걸면 귀걸이 코에걸면 코걸이 식의 자기 합리화가 가능해집니다 더더욱 세련되면 궤변이 되는 것이구요

제가 가진 경험의 범주 속에서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입니다
여기에서의 이기적 이라는 것은 또다른 한편으로는 생존의 조건입니다(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즉 부정적인 의미와 긍정적인 의미가 혼재하고 있습니다
(푸코가 이야기한 헤테로토피아 (혼재향,heterotopia) 적 세계  말과사물-민음사)
저는 그 것이 문명이란 것의 한계이자 다른 창조성(?)의 계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절대주의 혹은 유사한 절대적인 것이 있다고 산정하는 것의 문제는
논의의 폭을 아주 협소하게 단정짓는 것입니다. 즉 열린 가능성의 통로들을 막는 것입니다.

먼저 시의라는 것의 한자는 님이 설명하신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사전적 정의라는 것을 생각해봅시다,  변형생성문법이니 이런 것들을 논하지 않더라도
사전이란 것의 용도는 간단명료한 정의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그런 언어의 사용하는 주체의
입장은 대체로 배제된 상태에서의 건조한 바탕들, 그렇다고 그 사전적 의미가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건조한 바탕이 가지는 조건에 귀속시키는 것이 정당하다는 생각임)
즉 그것은 어떤 합의된 것이지 언제나 온당하다는 것은 아닙니다(이야기의 주체에 따라서).

인간의 언어중에서도 글이라는 것은 중세에는 권력의 수단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글자를 안다는 것은
바로 권력이라는 것과 연관이 있었습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바로 동시대의 사람들이 이해할수
있는 글로 번역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사제들이 쓰던 글인 라틴어는 바로 권력의
상징물이 었습니다. 위의 것들을 정리하면 언어라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닌
변형의 과정(역사적이며 의미적으로) 거칩니다.
푸코가 지식의 고고학을 쓰면서 고고학적인 시선과 방법론(발굴하듯이 아주 조심스레)으로 인식론의
역사를 훑어내리던 이유는 제가 생각하는 철학함의 이유입니다.
인간의 역사가 근대로 넘어오면서 권력이라는 것은 그람시가 이야기한(안토니오 그람시- 옥중수고)
헤게모니 논쟁과 맞물려집니다(조금 비속하지만 쉽게 이야기한다면 밥그릇싸움)

이런 쟁투의 장에서 즉 그런 변형의 과정을 움직이는 표면적인 세력이 되기위한 싸움이라는 것의
주체가 누가 되느냐하는 것이 서양의 근대화 과정의 가장 큰 싸움중에 하나였습니다.
물론 이런 도식화를 우리사회에 직접적으로 대입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현실에서 서양철학을 공부하고 논의한다는 것에 대한 반성과 필요성은 김진석의 저술들을 참고하시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탈형이상학과 탈변증법-문학과 지성사,  초월에서 포월로, 니체에서 세르까지 - 두권 모두 솔출판사)

님이 이야기하신 편견의 의미는 제가 생각하는 관점에서는 열려있지않는 사전적 의미라고 여겨집니다
즉 부정적인 판단의 근거가 앞서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이야기한 편견이라는 것은 그런 주체의 위치에 따라 가변적입니다.
이런 가변적인 것의 이유는 앞에서 이야기한 고고학적 방법과 즉 발굴하듯이 아주 조심스레
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전면에 나서는 시간의 흐름을 살핀다는 의미와 상통합니다
시간은 이런 가변성을 허용합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늙으면서 젊다라는 말을 생각해봅시다(김용옥의 어느 책에서 본 것 같음)
이것은 맞으면서 틀리는 겁니다 (어떤 잣대를 가지고 들이미느냐에 따라서)
즉 그 어떤 사람은 젊은 시절도 있었고 늙은 시절도 있습니다
그 것은 그 사람이 가진 고유한 이름이 변한것이 아니라 시간이 변한 것입니다
아니 시간의 변화에 따라 자신도 변하는 부분이 있고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겠지요
즉 이런 상대적인 논리들은 어떤 순간에 대입하느냐에 따라서 맞고 틀림이 판가름 되는것이지
선험적으로 맞다 틀리다를 규정짓는 것은 대체로 자신의 판단을 가두는 형태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자 그럼 간단하게 공간이라는 것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근대이후까지 공간이라는 불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1+1=2가 맞습니다
**님이 어딘가에서 서양의 철학은 모두 플라톤 철학의 각주였다는 이야기를 인용 한적이 있다고 기억합니다 (화이트헤드의 이야기)
그런 플라톤의 공간 개념이 무너진 곳은 현대 물리학에서 양자역학이라는 녀석인데
양자역학을 정리한 하이젠베르크는의 설을 종합하면 1+1=1.몇이 나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것이 가능한 것은 미립자는 세계에서이지요(물론 이것은 제가 아는 범위의 것을 즉 전문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범주의 것을 넘어서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좀 힘이드네요, 즉 개념적 범위의 것이아닌 실험실 적인 범위의 것 말입니다) 사람이 일반적으로 느끼는 세계에서는 물론 플라톤의 이야기들이
대체로 적합하지만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이것은 실험실에서 일어난 어떤 전제의
깨짐보다는 다른 창조성으로 연결될 수 있는 통로라는 것에 더 가치를 두고 싶네요).

의미를 지니는 기호들이라는 것은 제 생각에 이렇게 가변적인 틀속(패러다임)에서 시대(시간과 공간의 접점)에 따라서 통용되는 합의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정리를 해보면 김영삼의 편견과 나의 편견은 편견이라는 말 즉 귀에 들리는 소리는 같아도
제가 사용한 의미는 다르게 작용합니다
(이것은 언어의 한계인가 나 자신의 한계인가는 아직 잘 모르겠네요)
아까 말한 변형의 과정을 움직이는 표면적인 세력들이 어떤 편견에서(현재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인간의 삶의 형식으로 정착된 현실에서) 어떤 행위를 하는가 하는 것과 그런 행위들은 어떤 메카니즘으로 연결 되는가 하는 것에 설명이었다고 하면 답변이 될까요?

쓰다보니 또 길어졌네요
다른 의견과 의미를 기다리며.........


발의하셨던 분은 의견은 공감하지만 언어선택에 대한 약간의 불만을 제기했습니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언어로 규정지어달라는 의미였습니다. 지금도 이부분은 개인적인 입장은 변함이 없지만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가져다주는 경험들이 많은 공부를 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네번째 이야기: 사족: 어떤 단상

님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제가 한가지 문제를 너무 주관적인 관점을 앞세운 것 같군요
물론 그 한가지는 언어라는 것의 문제인데

따지고 보면 제가 문제를 너무 먼 곳에서 접근해서 그런 것 같네요
즉 더 상세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서 많이 생략된 형태로 보여드렸나봅니다
물론 제가 생각하는 관점(어떤 관점의 표출은 상당히 많은 사념과 경험으로 축적되어 나타나는것으로 이해하고 있슴)으로는 상식이라는 것도 그런 통용의 의미 즉 내 자아라는 것에 대입하면 하나의 참고하는 것입니다

상식이라는 것도 시대에 따라서 가변적이니까요
(즉 객관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객화 시킬 수는 있습니다, 물론 저는 객관이라는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요)

님의 의견과 저의 의견은 거의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즉 비슷한 결론의 선상에서 다른 경로를 타고 들어왔다는 점이 제게는 많은 도움이 된 것 같군요

그럼 님의 계속적인 정진을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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